지금은 눈물을 흘려야 할 때
눈은 마치 마음의 출구와 같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마음의 문은 열립니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것은 한 인간이 비로소 아름다운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믿습니다
눈물은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눈물을 흘리신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진정으로 말해서 눈물을 고귀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이에게 너의 사랑을 주는 것은
마치 도둑에게 너의 돈 가방을 지켜 달라고 맡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이 없는 사람은 그 사람 자신의 인간다움을 땅에 묻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우리가 슬피 울며 통곡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은 울어야 할 때이며 이 세상은 울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1995년에 쓴 소감이어서 시간차가 있음)
몇 해전 사랑하는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소천 하셨을 때 나는 갑작스럽게 당한 일에 대해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리스챤이 나 혼자였기 때문에 외롭고 고독한 장래기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가 지나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우연히 버스를 타게 되었는데 저쪽 경로석에 앉아있는 할머니 한 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순간적으로 그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을 하면서 아! 나에게는 이제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구나! 어릴
적 나를 업어서 키우셨던 그 할머니! 나에게 언제나 자상하셨던 그 할머니!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주셨던 그 할머니가 더 이상 나의 곁에 계시지 않는구나!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몇 정거장을 지나는 것도 모르고 거기 버스안에 서서 독하게 울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저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직면했습니다.
할머니가 구원의 어떠한 확신도 나에게 남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나
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말로다 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2장15절로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
지라" 하나님은 우리아의 일로 다윗에게 근심과 슬픔을 더하셨습니다.
바로 그의 갓 나은 아이를 치신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
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말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저희로 더불어 먹지도 하니했습니다.
그러나 이레 만에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그제서야 누웠던 곳에서 일어나 몸
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음식을 그 앞에
베풀고 먹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신하들에게 다윗은 말했습니다.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
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
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
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로마서 9장15-16절) 그때 하나님
의 주권이 저에게 무섭게 다가왔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울고 기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주님이 불쌍
히 여기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저는 혼란스러웠습니다.
1995년부터 저는 신앙에 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신앙공동체에서의 갈등은 고사하고 저는 아버지로 인해 언제나 마음이 무거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 말기 증세를 보이면서 갑작스럽게 발작을 하기도
하고 병을 깨서 어머니를 위협하기도 하고 칼부림이 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버지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부 분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렵게 구한 직장생활도 제대로 될리가 없었고 신앙생활에서도 뜻밖의 복병을 만나 고뇌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아버지를 주셨을까?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이런 아버지를 용서하고 억제할 수 없는 정을 느끼기도 하였지만 어느날
병을 깨서 난동을 부리시는 아버지와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방바닥을 보는 순간 저는 이성
을 잃고 아버지를 마당에 내동댕이 치고 말았습니다. 죄의식으로 고통하였습니다.
벌써부터 가족들은 만장일치로 아버지를 기도원으로 보내자고 장남인 나에게 압력행세를
하던 차에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메스컴에서 한창 기도원 폭력에 대한 기사로 떠들석 했었고 집안어른들이 한사코 반대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새벽녘까지 마룻바닥을 적시며 야곱 처럼 하나님께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라는
심산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안타깝고 괴롭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에게 있는 방법이라고는 하나님 앞에서 우는 일 뿐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앞에서 울 듯이 그렇게 말이죠. 그때 찬송가 419장을 부르고 있을 때
주님은 나의 가슴속에 놀라운 평안을 주셨습니다.
"구주여 광풍이 일어 큰 물결이 뛰놀며 온 하늘이 어둠에 싸여 피할 곳을 모르니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안돌아 봅니까 깊은 바다에 빠지게 된 때 주무시려 합니까 구주여 떨리는 내 맘 저 풍랑과 같아서 늘 불안에 싸여서 사니 날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풍파가 나를 삼키려 합니다. 지금 죽게 된 날 돌아보사 곧 구원해 줍소서 --- 큰 바람과 물결아 잔잔해 잔-잔해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놀 능력이 없도다.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해 잔-잔해. 주 예수 풍파를 꾸짖어 잔잔하라."
저는 이 찬송가를 몇 번이고 부르면서 기쁨과(주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확신의 눈
물을 흘렸습니다. 나의 고뇌와 슬픔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변해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확신으로 다음날 아버지를(내 손으로 어거하여)기도원으로 모셔가게 되었고
나와 식구들 원망을 많이도 하셨지만 1년을 그곳에 계시면서 아버지는 건강이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차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 봅니다. 나의 생애에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었나 하고.
주님을 만난 뒤로는 아마도 그때...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마룻바닥을 적시던 그 때 그리고 주님의 함께하심을 확신
하고 눈물 흘렸던 그때가 나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어둠속에 계시고 나의 기도를 무색하게 합니다.
아버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으로 인한 치
매인데 아직까지 치매에 대한 치료제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외부에서 나에게 전화가 오면
건너방에 나를 찾으러 오셨다가 왜 왔는지를 잊어 버리십니다.
이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저는 아버지도 할머니처럼 구원의 확신이 없이 돌아가시면 어쩌
시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내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죽은자를 살리시며 없는 자를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아버지를 보면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인간적으로 볼 때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그것을 주님께 내려놓고 우는 일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말이죠.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떠한 응답을 주실지 사실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
은 하나님은 나에게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
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오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값싼 감정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하나
님이 다윗의 가슴에 말씀하시듯이 그렇게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지금도 눈물의 효력을 알고 있습니다. (눈물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들을까봐 염려가
되지만-결코 그런 것은 아님) 오늘은 우리가 울어야 할 때입니다.
내 주변에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제 갑자기 구원의 확신도 없이 세상을 떠날지 모릅
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슬픈 것 가장 무서운 형벌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옥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에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생기는 것, 바로
지옥이겠죠.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종종 우리가 맛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영혼의 운명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
운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와 그로인한 영혼의 고통! 아마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시고 분리되어서 절규하던 그 고통(육
체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고통)을 영원히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지만 왜 이렇게 우리는 태연히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처럼 이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아니 오늘은 우리가 울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우리의 불충함 때문에 우리의 반복되
는 세상사랑과 이기심의 죄 때문에 그리고 이 순간에도 예수님을 몰라 죽어가고 있는 영혼
들을 위해서 울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눈물을 흘릴 때 우리에게 있는 많은 짐들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
니다.(욥16:20,시6:6)
다윗이 얼마만큼 울보였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을 열심히 읽어 본 사람이라면)
듣기가 좀 거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다만 웃기만 하고 울 줄을 모르는 사람은 깊이가
없고 피상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웃고 다니는 사람은 내적인 공허를 드
러내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을 배격하는 말이 아님) 웃
음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있게 건드리지 못하지만 그리고 마음의 고뇌없이 흘리는 눈물은
의미가 없지만(시42:3 전4:1 애1:2)
진실된 눈물은 우리를 주님께 가까이 나가게 합니다. 자기는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도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나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 울지 못하는 사람은 속죄의 기쁨을 모르는 사람이라
고 감히 생각합니다.(눅7:38,44) 자기 죄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도는 눈물의 기도라고 확신합니다.
물론 눈물 그 자체에는 사실 아무런 공로도 없으며 효력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
의 마음속에 있는 당신의 진심을 표현하는 도구가 됩니다.(왕하20:5)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진실된 눈물을 보십니다.
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운다는 것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예레미야는 눈물의 선지자였
습니다.(렘9:1,18 13:17..)모든 종류의 무기를 다 휘두르고도 승리를 얻지 못했을 때 그 마
지막 무기는 눈물이 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기쁨으로 영
혼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울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깊은 슬픔으로
위로받을 길이 없이 울 날이 올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게 될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 0